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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8년10월07일 16시38분 ]
▲ 연해주의 조선인 항일의병들

 북변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
이범윤(李範允)이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에 제수된 1902년 무렵 간도 지역의 조선 이주민들은 청나라 관리들의 차별과 배척, 토호들의 횡포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마적들의 습격까지 자주 일어났다. 당시 간도에는 7만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간도지역의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간도와 함경도 지역의 포수 및 장정 수백 명을 고용해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고 병영을 설치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와 함께 10호를 1통(統), 10통을 1촌(村)으로 하는 조선인 자치행정 체제를 수립하고 세금을 징수하여 사포대 유지비를 충당했으며 청나라에 납세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했다. 나아가 이범윤은 사포대를 근간으로 하여 항일구국 의병을 조직할 계획을 세웠다. 간도는 국외 항일의병 기지로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그 무렵(1904년 2월) 일본 함대 총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대장이 이끈 일본 함대가 러시아 조차지(租借地)인 뤼순(旅顺·여순) 항을 기습, 러시아 함대를 박살내고 다음날에는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두 척의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키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주요무대는 만주 남부와 한반도 근해였다. 러일전쟁은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두 강대국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 무렵 이범윤은 고종황제로부터 한통의 비밀칙서를 받았다. 의병을 일으켜 러시아군과 연합, 대(對)일본 전투에 나서라는 칙서였다. 이범윤은 곧바로 의병 모집에 나섰다. 한 나라의 정궁(正宮)에까지 쳐들어와 국모인 중전을 서슴없이 살해하고 조선을 복속하기 위해 온갖 획책을 서슴치 않는 일제의 무도한 행태에 들끓는 울분을 삼키고 있던 조선의 우국청년들이 두만강 너머 함경도 지역과 만주 각지에서 일제 타도를 다짐하며 속속 모여들었다. 이범윤은 이들 의병진을 충의대(忠義隊)로 명명하고 병영을 수축한 뒤 총기와 탄약을 사들여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마침내 이범윤은 1천여 명에 이르는 충의대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군 카자흐전투여단 아니시모프(Anisimov) 장군과 합류해 ‘특별조선인중대’라는 부대명으로 함경북도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별조선인중대의 눈부신 승전보가 이어지자 러시아 황제는 이범윤에게 공로훈장을 수여하기까지 했다 
일본군은 고종을 압박해 이범윤을 소환하고 충의대를 해산할 것을 강요했다. 한동안 일본 측의 강요를 묵살해오던 고종황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1905년 5월 하는 수 없이 이범윤 관리사의 소환과 충의대 해산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가을 러일전쟁은 일제의 승리로 끝나고, 그해 11월17일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탈취하고 조선의 내정을 장악하기 위해 통감부를 설치했다. 나라가 사실상 망한 것이다.

▲ 연해주 조선인들의 별 이범윤

연해주로 망명, 연추의병부대 조직
조국이 국권을 잃은 가운데 조정으로부터 소환령이 내려지자 이범윤은 본격적인 항일구국투쟁을 위해 간도관리사를 사임하고 1906년 초 7백여 명의 충의대 장병들을 인솔해 훈춘을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했다. 조선인 최초의 마을인 지선허(地新墟·티신헤) 인근 연추(煙秋 또는 延秋)에 정착한 이범윤은 1908년 초 연해주 지역의 거부인 러시아 귀화인 최재형(崔在亨)의 재정적 지원으로 충의대를 확장, 항일의병단체인 연추의병부대를 조직한다. 
연추의병부대는 총독에 이범윤, 총대장에는 국내에서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이끌었던 을미의병(乙未義兵)의 대표적인 의병장이자 당대의 거유(巨儒) 의암 류인석(毅菴 柳麟錫), 대장에는 전제덕(全濟德), 좌영장 엄인섭(嚴仁燮), 우영장 안중근(安重根)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했다.
그해 4월 이범윤이 연해주에서 항일의병단체를 조직한다는 소식을 접한 전(前) 러시아 주재 공사였던 그의 형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아들 이위종(李瑋鍾, 1907년 3명의 헤이그 밀사 중 한 사람)을 연해주로 보내 거금 1만 루블을 지원하고 아들 이위종으로 하여금 이범윤의 의병단체 결성을 돕도록 했다. 
3천여 명 규모로 증강된 연추의병은 1908년부터 국내 진공을 펼쳐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좌영장 안중근·우영장 엄인섭 등이 각각 백여명 내외의 소규모 대원을 이끌고 갑산·혜산진·무산·회령 등지의 일제기관과 일본 수비대를 끊임없이 공격, 일본군과 일제기관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멘붕 상태에 빠졌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이후 이범윤은 의병장 출신들이 중심이 된 십삼도의군(도총재 류인석) 창설을 류인석·이상설(李相卨)·이남기(李南基)등과 함께 주도해 십삼도의군 창의총재(彰義總裁)에 추대됐으며 1911년 5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류인석·최재형·최봉준(崔鳳俊)·홍범도 등과 함께 권민회(勸民會)를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 후 1920년 무렵 연해주를 떠나 북간도로 건너온 이범윤은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해 총재를 맡아 항일투쟁을 지휘하는 등 수많은 항일단체와 조선인 권익기구를 조직하고 전투를 이끌어 한국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이범윤의 사망 연대와 사망 장소는 명확하지 않다. 노환이 깊어 거동이 어려워지자 1938년 아들(양자) 이억종(李億鍾)이 만주로 가서 비밀리에 모셔와 1940년 10월20일 서울 공덕동 이억종의 집에서 85세의 나이로 영면, 화장되었다는 설이 전해지는데, 당시 항일독립운동가들은 죽어서도 장례조차 비밀리에 치러야 했기 때문에 후손들은 화장된 유해가 어떻게 수습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1968년 이범윤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허묘로 안장되었다.
(목요일 계속). 


발문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은 고종황제로부터 한통의 비밀칙서를 받았다. 
의병을 모집해 간도사포대(間島私砲隊)를 증강한 후 의병진을 이끌고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대(對)일본 전투에 나서라는 칙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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